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루터 (문단 편집) === [[종교 개혁]] 시기 (1517~1525) ===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 >새찬송가 585장, 마르틴 루터, 1529 루터의 일생과 [[유럽]] 역사를 바꿀 사건의 전조는 1515년, [[독일]][* 당시 독일은 지리적인 명칭이었고,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느슨한 연방 체제 국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직할지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 기준으로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끝이었다.]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중세 교회의 [[면죄부]]([[대사(종교)|대사]])였다.[* [[가톨릭]]에선 자신들의 종교적 타락과 부패를 은폐하고 희석시킬 의도로 [[대사(종교)|대사]] 혹은 면벌부로 번역하지만 한국루터교회에선 면죄부, 다른 [[개신교]] 교파에서도 역사성을 고려 면죄부로 번역한다. 최근에 가톨릭교회의 요구로 면벌부로 바뀐 번역도 있지만, 아직도 면죄부 사용이 압도적이다.] 루터는 당시 작센 선제후국의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신학교수이자 수도사제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근처 [[마그데부르크]]에서 면죄부 판매 행렬이 있었고 작센 선제후국의 신자들까지 소문을 듣고 면죄부를 사러 다니는 형편이었다. 당연히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이유가 있었다. * 당시 루터가 살던 [[비텐베르크]] 근처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겸 할버슈타트 주교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1세 네스토어|요아힘 1세]]의 동생인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 37대 [[튜튼 기사단]]장이자 1525년 [[루터교회]]로 개종한 초대 [[프로이센 공국]] [[공작(작위)|공작]] [[알브레히트(프로이센)|알브레히트]]와는 동명이인으로 심지어 둘은 사촌이었다.]이 교회법에서 정한 나이 제한[* 유력 가문의 자제들을 고위 성직자로 임명하는 것은 당시 흔한 일이었다. [[레오 10세]]도 13세에 [[추기경]]이 되었다.]과 겸직금지를 무시하고 2개 교구를 겸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신성 로마 제국의 최선임 [[선제후]]인 [[마인츠 선제후국|마인츠 대주교]][* 황제 선거시의 마지막 투표 권한이 있어 캐스팅보드의 자격이 있고, [[독일 왕국]] 재상이라는 명예직도 있다. 그 외에 알프스 이북의 [[교황]]의 대리인으로 불릴 정도로 강한 권력을 지녔다. 물론 마인츠 대주교 자리를 노린 것은 기회만 되면 호엔촐레른 가문에서 황제를 한번 배출해 보겠다는 요아힘 1세의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다.] 자리가 매물로 나오자, 최고가인 2만 9천 두카트로 입찰(?)하여 매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럽 최고의 사채업자(?) 야코프 푸거에서 2만 1천 두카트를 빚졌고, 교황청에서는 마인츠 교구 초입세[* [[십자군 전쟁]] 시기부터 성직제후들에게 부과한 세금으로 첫해 수입을 모두 바친다. 이후에도 관례화되어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도 폐지되지 않았다.]와 주교령 판매자금도 뽑고,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도 벌기 위해서 [[도미니코회]] [[수도자]] 요하네스 테첼[* 1502년부터 [[레오 10세|조반니 메디치 추기경]]의 수하로 [[폴란드 왕국]]에서 [[종교재판]] [[이단심문관]]을 역임했고, [[티롤]] 지방에서 간음 등의 엽색행각으로 황제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에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교회의 탄원으로 풀려난 전적이 있는 막장인물이었다.]을 파견했다. 결국 [[교황청]]에서 8년간 [[면죄부]] 판매를 허가하고 반은 교황청에 바치고 반은 마인츠 대주교가 버는 대로 사채 빚을 변제하기로 합의한 것. * [[도미니코회]] 요하네스 테첼 수사는 열정적인 설교자로 청중들에게 성 베드로의 유골이 풍찬노숙할 지경에 이르렀다며 허위선전을 하고, 조상들이 [[연옥]]의 불길에서 고통 받는다며 현세에서 후손들이 사지 않으면 조상들은 자식들을 원망할 것이고 오랫동안 고통을 누리게 된다고 죄책감을 자극했다. 살인과 신성모독을 제외한 모든 죄목에 대해서까지 면죄부를 판매했다. 기존의 면죄부 혹은 대사라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현재와 과거[* [[연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의 구원 목적의 면죄부는 교황 [[갈리스토 3세]] 시대인 1457년부터, 1476년 [[식스토 4세]]의 교서 <우리의 구원(Savator Noster)>에서 죽은 자는 후손이나 친척이 대신 면죄부를 사도 효력이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 교회 밖에선 당연히 이에 대해서도 비판했다.]는 물론 미래에 저지를 벌까지 면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예를 들어 사소하게는 [[사순시기]] 동안 [[버터]]를 먹어도 될 권리 정도부터, 살인 같은 중죄까지도 면죄부로 팔아치운 것. 당시 이를 비꼬는 일화로, [[독일]] 귀족이 면죄부 판매자에게 미래에 저지를 폭행죄의 면죄부를 산 다음 흠씬 두들겨 팼다는 이야기와, 강도죄의 면죄부를 산 후 그대로 면죄부 판매자의 금고를 뺏어 들고 달아나서 면죄부 판매상의 금전은 물론 방금 전 지급한 투자금(?)까지 금방 회수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 또한 [[교황청]] 도장이 찍히는 면죄부 판매의 공신력에 기대어 면죄부 판매 행렬엔 탁발수도자와 그들과 손잡은 추잡한 상인 행렬이 들어섰는데, [[성유물]](성물)이랍시고 팔아먹는 것들이 기적적(?)으로 진품일 확률도 있겠지만 "말뼈다귀는 성인의 유골로, 쇠스랑은 은촛대, 썩은 나무토막은 유골함으로" 둔갑해 팔았으며, 지푸라기나 흙까지 온갖 성서와 성인들의 유물로 둔갑하여 고가에 팔아먹는 폐단이 생겨났다. 이러한 성물 또는 성유물도 면벌의 효력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귀족과 부자들의 유사시 죄과를 용서받을 보험컬렉션이 됐고, 앞서 면죄부 판매의 원흉인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물론 루터를 보호한 작센 선제후까지 수천 년어치 면벌을 받을 성유물(성물)을 보유했다.(당시 교회에서는 성물 참배 혹은 구입시 1점당 연옥 100일 면제라고 선전했다.) 성물들은 귀신 쫓기와 병 고침 효험, 풍작을 가져 온다고 여겼기 때문에, 유력자들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주머니까지 털어갔다. 루터는 평소 동료 수도자들과 신학 교수들에게 면죄부에 대해 신학적으로 비판했고, 대체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1516년부터 루터는 면죄부의 위험성을 지적했고, 1517년 2월 설교에서도 대중들에게 면죄부에 대해 비판했지만, 이때는 별 반응이 없었다. 4월부터 작센 근처에서 면죄부가 팔리자, 본격적인 [[아우구스티노회]] 수사들과 동료 신학교수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지지를 얻어냈다. 9월에는 97개조의 ≪스콜라신학에 대한 논박, ''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을 저술하여 자신의 주장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도 제시했다. 브란덴부르크 주교 제롬(1490 ~ 1565),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 [[마이센(독일)|마이센]]과 프랑크푸르트 자이츠의 주교들에게도 '''파렴치한 신성모독을 중지할 것'''의 내용의 항의 편지를 보냈지만 원흉인 알브레히트는 이를 넘겨버렸고, 요하네스 테첼(Johannes Tetzel, 1465~1519)은 소식을 듣자 논문을 통해 루터를 [[이단]]으로 간주했다.[* 요하네스 테첼은 학식이 없었기에 본인이 직접 쓴 것은 아니었고, 루터의 대적자인 비아드리나 대학교 신학교수들이 쓴 것을 테첼의 명의로 발표했다.] 결국 이 편지 내용을 바탕으로 [[모든성인대축일]](11월 1일) 전날인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앞에 있는 '모든 [[성인(기독교)|성인]] 성당'의 문에 [[팩트체크]]의 역할을 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가톨릭]]에서는 그저 지역 성직자에게 항의 서한을 보낸 것이라고 본다. 근거는 1960년대 가톨릭 교회사가가 기존의 16세기 중반 [[필리프 멜란히톤]]의 책을 보고 그는 그 자리에 없어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한 것, 개신교 교회사가 중에서는 절충으로 10월 31일에 항의 편지를 보내고 11월 중순에 반박문을 내건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굳이 교회 문에 내건 이유는 '교회에 정면으로 도전하겠다' 따위의 상징적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당시 교회의 문은 일종의 게시판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교회 문에 때려박은 반박문은 당시 '''지식인의 언어인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당시 [[교황청]]에서는 당시 사태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고 일단은 무시했으나, 때마침 50여 년 전 발명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에 이 반박문의 번역본이 불과 '''14일 만에 비텐베르크에서 제국변경 [[알자스]]의 [[스트라스부르]]와 [[스위스]]의 [[바젤]]은 물론 제국 너머 [[독일 기사단국]]의 [[쾨니히스베르크]]까지 [[독일어권]] 전역에 퍼졌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이 당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자체는 아직 가톨릭과의 완전한 단절까진 가지 않았다고 본다. 단 여기서 말하는 것은, 루터가 아직 가톨릭교회의 개혁에 희망을 걸었고 가톨릭에서 교육받은 신학관을 바탕으로 내걸었다는 것이지, 95개조 반박문 내용 자체가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수용 가능한 범위는 아니다. 사실 현재도 수용 불가능하다.] 당시 [[교황청]]은 매우 복잡한 사정들을 가지고 있었다. 1517년 [[레오 10세]]가 사랑하는 조카 로렌초를 우르비노[*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 지방 페사로에우르비노 주에 있는 도시] 공작으로 꽂아주려고 전쟁을 벌여서 2년 간 전비로 80만 [[두카트]]를 지출하여 파산 직전에 몰렸고, [[매관매직|재정난 타개를 위해]] 7월에 한꺼번에 31명의 [[추기경]]을 서임할 정도였다.(당연히 [[메디치 가문]]의 친족도 꽂아 넣었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날에는 교황 암살스캔들이 번져서 더 정신이 없었다.[* 동성애 성향의 [[레오 10세]]가 자신의 동성애인으로 추정하는 페트로치 추기경에게 [[살인죄]]를 물어 [[참수형]]에 처하고, 연루된 다른 추기경들은 심문 끝에 속죄하고(돈을 바치고) 풀려났다. (<교황 연대기> -존 줄리어스 노위치-)]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교황청에서 루터에게 손대기 난감한 점이 있었다. 당시 [[황제]]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는 노환으로 오늘내일 했고, 곧 황제 선거가 가까웠는데 [[레오 10세]]는 그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막시밀리안 1세의 장손자[* 막시밀리안 1세의 유일한 아들 [[펠리페 1세|필리프]]는 일찍 죽었다.] [[스페인 국왕]] [[카를 5세|카를로스 1세]] 대신 루터에 공감하던 [[베틴 가문]]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작센)|프리드리히 3세]]를 새 황제로 점찍었기 때문이다. 해를 넘겨서 1518년이 되었고, [[도미니코회]]와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루터가 이단이라고 [[교황청]]에 고발했다. 교황청은 먼저 [[아우구스티노회]]에서 자체적으로 수습하길 바랐으나, 1518년 4월 [[팔츠 선제후국]]의 수도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노회 총회에서조차 루터의 주장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자리에서 [[도미니코회]] 수도자 마르틴 부처(Martin Bucer, 1491 ~ 1551)와 헤센 방백 [[필리프 1세(헤센)|필리프 1세]](1504 ~ 1567)는 루터에 감화되어 종교개혁가로 돌아섰다. 남독일에서도 종교개혁이 퍼지게 되었고, 부처와 필리프는 훗날 츠빙글리와 루터 사이를 다니며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기존 중세 스콜라 철학과 면죄부 판매에 오염된 가톨릭 견해를 반박하는 28개조 논제를 제시했고 독일 아우구스티누스회 대부분의 수도사제와 남독일 지역 다른 수도회나 교구 사제들마저 대부분 루터에 찬성하는 의견으로 돌아섰다. 28개 논제는 다음과 같다. * 1. 하나님의 율법은 삶의 가장 건전한 지침이긴 하지만 인간을 의의 길로 나가게 할 수 없으며 도리어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한다. * 2. 하물며 자연적인 교훈의 도움을 받아 흔히 반복되는 인간의 행위들은 더욱 더 그렇게 할 수 없다. * 3. 인간의 행위들은 언제나 매력있고 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들은 죽을 죄들인 것으로 보인다. * 4. 하나님의 행위들은 언제나 매력 없고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들은 참으로 불멸의 공적들이다. * 5. 인간의 행위들(선한 것처럼 보이는 행위들을 말한다)은 그것들이 범죄(Crimes)라는 의미에서 죽을 죄인 것은 아니다. * 6. 하나님의 행위들(인간을 통해 행해지는 행위들을 말한다)은, 그것들 이 죄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공로들은 아니다. * 7. 만약 의인들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경외 속에서 그들의 행위들을 죽을죄로 생각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행위들은 죽을 죄가 될 것이다. * 8. 인간의 행위들이 두려움 없이 전적으로 악한 확신 가운데서 행해진 다면 그 행위들은 한층 더 죽을 죄가 된다. * 9. 흔히 말하듯이 그리스도 없는 행위들은 죽은 것이기는 하지만 죽을 죄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포기하는 위험한 일인 것으로 보인다. * 10. 실제로 어떤 행위가 죽은 것이기는 하지만 해롭고 죽을 죄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 11. 모든 행위에 있어서 정죄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면 교만을 피할 수 없거나 참 소망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 12. 인간들이 죄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두렵게 여길 때 죄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 * 13. 타락 이후 [[자유의지]][* 이하 루터가 설명한 기독교인의 자유의지는 1525년에 저술한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에서 구체화 된다. 단편적인 소개는 나무위키 [[예정설]], [[이신칭의]], 항목과 [[자유의지]] 항목 중 신학/기독교 목차 참조 바람.]는 단지 내용 없는 빈말에 지나지 않으며, 자유 의지의 능력범위 안에 있는 것을 행하고 있는 한 그것은 죽을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 14. 타락 이후 자유 의지는 선에 대해서는 단지 실현할 수 없는 능력으로서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지만, 악에 대해서는 실현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 15. 또한 자유 의지는 무죄 상태에서도 실현할 수 있는 잠재력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무죄 상태에서조차도 자유 의지는 선을 향해 어떤 진보를 할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의 실현할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 16. 자기의 자유 의지로 최선을 다함으로써 의에 도달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죄에 죄를 더함으로써 이중으로 범죄하게 된다. * 17.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실망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겸비케 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자 하는 열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 18.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적절하게 준비되기 위해서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철저하게 절망해야 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 19.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 만드신 것들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바라보는 사람(롬 1:2)은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없다. * 20. 그러나 고난과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보이는 것, 하나님의 '등'(출 33:23)을 인식하는 사람은 도리어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있다. * 21. '영광의 신학자'는 악을 선이라 부르고 선을 악이라 부른다. '십자가의 신학자'는 사실 그대로 말한다. * 22. 행위들로부터 인식되는 대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는 그러한 지혜는 사람을 극히 교만하게 하고 눈멀게 하며 완악하게 한다. * 23. 또한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킨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을 죽이고 욕하고 죄되게 하고 심판하며 정죄한다. * 2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지혜는 악하지 않으며 또한 율법은 회피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이 없이는 사람은 가장 선한 것들을 가장 나쁜 방식으로 오용하게 된다. * 25. '많이 행하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행위'가 없더라도 [[이신칭의|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다.]] * 26.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진 적은 결코 없다. 은혜는 이것을 믿으라"고 하나 모든 것은 즉시 이루어져 있다. * 27. 그리스도의 행위는 능동적인 행위라 부르고, 우리의 행위는 그 능동적인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수동적인〕행위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수동적인 행위는 능동적인 행위 덕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된다. * 28.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을 발견하는 것 이 아니라 도리어 〔사랑할〕 대상을 창조하신다. 인간의 사랑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을 발견하며 시작된다. 교황청에서는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레오 10세]]는 칙령을 내려 '대사의 효력과 판매 권한'에 대한 논쟁을 금지하고 어기는 자는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와중에도 1518년 4월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루터는 이에 불복했다. 신학적으로 [[면죄부]]의 효력에 대해 부정했기 때문에 면죄부의 효력을 오인한 일반 신자들이 면죄부에 의존하면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죄는 그대로인 채 신자가 죽게 되면 진짜 심판에서는 지옥행일 텐데, 성직자가 되어서 양심상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논리였다. 교회에선 일단 분란의 책임을 물어서 회개와 순명을 명했으나, 루터가 교회에서 명한 '''회개''' 자체를 거부하자 교황은 그를 [[로마]]로 잡아와 종교재판에 회부하려 했다. 루터가 로마로 소환되면 죽을 것이 뻔했으므로 비텐베르크를 다스리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작센)|프리드리히 3세]]는 이 조치를 무시했다. 선제후는 비록 루터의 신학적인 면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루터의 설교를 전해 듣고 그동안 애지중지하던 [[성수(종교)|성수(聖水)]]는 버렸지만, 2만 9천여점의 성유물은 죽을 때까지 보관했다.] 그럼에도 루터를 끝끝내 보호했는데, 이는 중세 대학이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루터가 재직했던 비텐베르크 대학교는 프리드리히 3세가 설립한 학교였고, 통치자의 입장에서 루터를 보호할 책임이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책임이 해도 작센 선제후 정도 되는 고위귀족인 프리드리히 3세 입장에서 귀족도 아니고 평민 출신인 루터를 황제와 교황의 압박에도 보호한 것은 당시 기준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때문에 후대 개신교인들은 프리드리히 3세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결국 프리드리히 3세의 중재로 로마에 가는 대신 남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교황의 특사인 카예탄(Cajetan) [[추기경]][* 생몰은 1469 ~ 1534년생으로 본명은 토마스 드 비오(Thomas de Vio)로, [[도미니코회]],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전문가.]에게 심문을 받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결정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uther-vor-Cajetan.jpg|width=400]] 3번의 심문에서 카예탄은 추궁과 번복을 요구했으나, 루터는 거부하고 토론을 요구했다.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의 문체와 어투가 정중하지 못한 건 사과하지만, 내용이 성경적 진리에 벗어나지 않는 한 철회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카예탄은 [[95개조 반박문]]의 내용을 반박했고 대사의 권한이 [[사도전승]]과 [[가톨릭교회]]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교황의 권위를 앞세운 반면, 루터는 [[공의회]]와 성경의 권위가 교황보다 더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3차례의 심문은 평행선을 달리며 입장차이만 확인했고, 이런 이견들은 교황청에서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었기에 더 이상의 심문은 불가능했다. 심문 후 루터의 반대자들이 살해 음모를 꾸몄고, 추종자들이 알려주자 루터는 밤중에 아우크스부르크를 탈출했다. 비텐베르크로 가는 도중 [[뉘른베르크]]에서 카예탄 추기경이 자신의 체포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듣는다. 결국 루터의 체포하는데 실패한 카예탄은 교황 [[레오 10세]]의 친서와 교황청이 세속제후에게 내리는 최고의 선물인 황금 장미장(Golden rose)[*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금, 보석 따위를 박은 장미 꽃잎 모양의 장식으로 로마의 교황이 교황청에 대해 공로를 한 국가나 도시에 사순절의 넷째 일요일에 이를 축성하기 때문에 선물 받는 개인 및 가문의 영광이기 때문이다.]을 프리드리히 3세에게 보내며 원하는 인물을 [[추기경]]으로 밀어주겠다는 제안과 "루터를 로마로 넘기거나 작센에서 추방하라"고 편지를 보냈지만, 프리드리히 3세는 교황의 친서를 무시했고, 루터를 보호했다. 이후 교황의 특사로 온 밀티츠 추기경은 루터의 보호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루터를 로마로 넘길 것을 설득했다가 실패했고, 결국 루터를 직접 만나 대화한 끝에 상호 간에 공적으로 침묵하는 걸로 넘어가려 했다.[* 이미 이전에 밀티츠는 알프스를 넘으면서 "독일 내에 반교황청 분위기가 심각하게 퍼지고 루터가 광범위하게 지지받고 있어서 체포는 불가능하다"고 로마에 보고했다.] 하지만 잉골슈타트 대학교의 신학교수인 요하네스 에크(Johann Maier von Eck, 1486년~ 1543년)[* 원래 요한 에크와 루터는 친분이 있어서 막역한 사이로 자주 서신을 교환한 사이였다고 한다.]가 ≪단검표(''Obelisci'')≫라는 논문으로 루터를 이단으로 기소했고, 1519년 7월 [[라이프치히]]에서 에크와 루터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루터는 토론 와중에 1세기 전 [[보헤미아 왕국]]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주장을 근거로 사용했고, 상대편에서 후스는 이단으로 화형당했음을 경고 했다.[* 사실 이는 요한 에크의 유도 심문으로 에크가 이전 루터 주장과 후스의 주장이 비슷하단 걸 간파하고 다시 토론에서 유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토론 이후 에크는 토론 승리를 직감했고 루터는 후스가 누군지 잘 몰랐기 때문에 속으론 아연실색했으나 토론 내용이 알려지면서 독일 민중들이 더 열광해버리는 기적(?)이 생겨난다.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난 것] 그러자 루터는 '''"교황의 권위뿐만 아니라 [[공의회]]조차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면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중심이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라이프치히 대학교]] 신학부는 15세기 보헤미아 [[얀 후스]] 시기 [[프라하 대학교]]에서 밀려난 [[독일인]] 교수들이 주축이 되었기에 얀 후스의 견해에 극도로 격앙되었고, [[라이프치히]]의 지배자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사촌이긴 하지만, 영지 문제 등으로 충돌을 벌여 갈등 관계였던 작센 공작 게오르크(Georg der Bärtige 1471~1539)의 영지였기 때문에 루터는 선제후가 보낸 20명의 무장병력이 아니었으면 무사히 빠져나오기 어려울 정도였고, 실제로 토론장에서 [[공의회]]와 [[교황무류성]]을 부정하자 죽이라는 함성이 거세졌고 더 이상의 토론은 불가능해졌으며 황급히 라이프치히에서 탈출해야만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루터는 점점 가톨릭교회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lla-contra-errores.jpg]] 이에 에크는 라이프치히에서 벌인 논쟁의 보고서를 통해 교황으로 하여금 루터를 파문하도록 했다. 결국 1520년 6월 24일, 교황 [[레오 10세]]는 정죄 교서 를 발표해, "60일 이내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이 교서는 기도문의 형식을 빌려서 "주님의 포도밭에 [[멧돼지]] 1마리가 날뛰고 있나이다!!"로 시작하는데, 이 멧돼지는 물론 루터를 뜻한다. 이에 맞서 루터는 교황의 교서와 가톨릭교회 법전을 불태우며 로마 교회와 완전히 결별을 선언한다. 루터는 또한 자신의 신학관을 명확히 정리하여 초기 3대 저작으로 꼽히는 ≪독일 기독교인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유수≫,,≪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를 발표하여 전통주의가 복음을 막고 있다며 교황의 수위권 등을 부정하고 나아가 [[사제(성직자)|사제]]제도까지 폐지를 주장한 만인사제론, [[7성사]] 중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제외한 나머지 5개를 폐지할 것 등을 주장하여 가톨릭과 전혀 다른 독자적인 체제를 선포한다. 이듬해인 1521년 1월 3일, [[레오 10세]]는 교서 를 발표해 루터를 [[파문]]했다. 루터를 지지한 작센 선제후는 루터가 파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보름스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설 수 있도록 주선했다. [[카를 5세]]는 황제선거 때 자신에게 투표한 작센 선제후의 체면을 존중해서 루터의 신변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파문당한 루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1414년 [[독일왕]] [[지기스문트]][* 콘스탄츠 공의회가 열릴 시점에서는 아직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기 전이었다.]의 신변보장을 받은 [[얀 후스]]도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했다가 재판 끝에 이듬해 화형당한 선례가 있어, 루터의 주변에서도 보름스에 가는 것을 말렸다. 루터도 이 여행에 확신이 별로 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교회와 로마교황청에 반감을 가진 독일 민중들 사이에서 루터는 이미 시대적 영웅이 되었고, 여행 도중 루터의 방문지마다 열광적인 지지자들이 나타나면서 개선 행렬이 되었다. 특히 루터가 수학했던 [[에어푸르트]]에 나타나자, 대학학장이 선두에 나타나서 루터를 영접했다. 루터는 지지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저는 사람들이 이것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진실을 말할 것이며, 이를 반드시 행해야만 합니다!!"'''라고 설교했다. 실내에서 설교 중, 많은 사람들이 모인 탓에 2층 골마루가 삐걱거리자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루터는 이것은 악마의 장난질에 불과하다고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루터는 에어푸르트에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선제후 궁정에 '''"기왓장 밑에 있던 악마들보다 [[보름스]]에 훨씬 더 많은 악마가 기다린다 해도 가겠다!"'''고 답장을 썼다. 1521년 4월 16일 루터는 보름스에 도착했다. 도착시간이 저녁이었지만 도시 인구보다 많은 2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고 한다. 다음 날 출석을 앞두고 당시 루터와 뜻을 같이 했던 [[에라스뮈스]]의 지지자들이 타협을 권했지만 루터는 거부했다. 다음 날인 4월 17일,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에 출석했다. 낯선 사람들의 앞에서 루터는 매우 수줍어하며 떨었다고 청중들은 전한다. 그러나 면전의 높은 관리들 앞에서는 당당하였다고 한다. 선제후 [[트리어 선제후국|트리어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는 마인츠 대주교처럼 대교구뿐만 아니라 세속적으로 제후령을 통치하는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이다. 당시 트리어 대주교 리하르트 폰 그라이펜클라우 추 폴라츠(Richard von Greiffenklau zu Vollrads 1467~1531)는 [[종교 개혁]]에 참가하진 않았지만, 루터의 신학적인 지식에 대해 개인적인 호감이 있었다고 한다.]의 고문관이 루터에게 첫 질문으로 "책의 저자가 맞는가??"를 물었고, 2번째로 "책의 내용을 철회할 뜻이 있는가??"를 질문했다. 루터는 첫 번째의 질문에는 "내가 쓴 저작이 맞다. 다른 저작들도 더 있다."고 대답하였고, 책의 내용들을 설명했다. 2번째 질문에 대해선 "입장을 정리하게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밝혔다.[* 루터를 지지하는 청중들은 이 대답을 듣고 동요했다. 이런 대답을 한 것은 작센 선제후의 부탁 때문이었다.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가 소환된 자리는 토론의 자리가 아니라, '''지정된 질문에 대해 진술만 허용'''된 자리였다. 때문에 루터가 대답하면 가톨릭교회와 황제에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주기 때문에, 선제후는 작센 대표들을 보내 막후 협상을 진행하려고 일정을 질질 끌려고 했다. 그래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다음날 더 드라마틱한 답변이 나왔다.] 심문자들은 분노했지만, 공정한 재판으로 보이기 원했기 때문에 상의 끝에 '''구두로 직접 답변할 것을 조건'''으로 허락한다. 다음 날인 4월 18일, 루터는 전날 답변하지 못한 2번째 질문에 답했다.[* 훗날 [[토머스 칼라일]]은 농부 출신 신학박사 마르틴 루터가 황제와 [[추기경]]의 앞에 서서 떨린 목소리로 답변하는 장면을 유럽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라 평가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D0%9B%D1%8E%D1%82%D0%B5%D1%80_%D0%B2_%D0%92%D0%BE%D1%80%D0%BC%D1%81%D0%B5.jpg]] >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여기에 서 있는 저는, (양심과) 달리 행동할 수 없습니다. (짧은 탄식 후에) >Gott helfe mir! Amen.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보름스 회의의 공식 기록은 이상의 2마디이나, 청중[* 이 청중들 가운데는 당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총독으로 있던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1세]]의 맏아들 크리스티안 왕자가 있었고, 루터의 연설에 감화된 그는 [[덴마크]]와 [[노르웨이]] 국왕 [[크리스티안 3세]]로 즉위한 후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종교개혁을 시행한다.]들은 다음 연설을 들었다고 전한다. >폐하께서 분명한 답변을 원하시니 다음과 같이 공손히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성경]]의 증언을 통하여, 또는 분명한 이유에 의하여 승복되기를 원합니다. 교회나 [[공의회]]는 자주 실수하고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것이 확실하며, 이들만으로는 믿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서나 명백한 이성적 근거라는 증거를 통해 제가 설득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저는 저로부터 나온 말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제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저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위험하고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독일왕]] [[카를 5세]]는 아이러니하지만 [[독일어]]가 짧았기에[* 카를 5세는 어린 시절을 [[플랑드르]]에서 보냈기 때문에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모어였다.] [[추기경]]에게 "[[공의회]]가 틀렸다고 한 것인가??"라고 물어봤고, 루터가 끼어들어 "예."라고 답변했다. 이에 황제는 발언 시간을 요구한 후 "루터는 공공연한 이단"이라며 그의 신학적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열변을 토했지만, 이미 청중들은 루터를 연호하며 상황이 기운 상태였다. 결국 루터의 주장을 철회시키려는 의도는 실패했지만, 당초 약속대로 루터의 신변을 보장하겠다고 말하며, 3주 내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것이며, 도중에 설교나 연설을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고, 3주 후에는 다른 조치가 있을 것이라 예고했다. 황제 측은 루터에게 즉각 떠나길 명령했고, 작센 선제후는 3일간의 토론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루터는 동료들과 은밀히 보름스를 탈출했고, 카를 5세는 [[Outlaw|'''"루터는 법 밖에 있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루터와 루터의 추종자에 대한 제국시민의 공민권을 박탈하는 명령인 제국 추방령이 내려졌고[* 2년 전 카를 5세는 황제 선거 투표 전 여러 공약으로 제국추방령 남발 자제와 적법한 기소절차가 아니면 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고, 대관식 이후에도 재차 서약했지만, 보름스 회의에선 400여 명의 제국회의 구성원 대부분의 지지를 얻지도 않고 제국추방령을 내렸다. 이는 [[개신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독일 제후들의 반발로 이어졌다. 이와 비슷하게 훗날 자신에 반대하는 제후들에게도 제국 추방령을 남발하여 결국 독일 가톨릭 제후들에게도 외면당하며 몰락을 자초한다.], 루터에게 숙식과 안전을 제공하는 것도 칙령으로 금지했다. 이는 루터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누구든 루터를 죽여도 살인죄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루터는 행방불명되었다.''' [[독일]] 내 많은 이들이 루터가 죽었다고 생각했으며,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추모했다. 그러나 사실은 루터가 밤중에 탈출하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가 살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하들을 시켜서 루터를 뒤따르게 했고, 명령을 내려서 복면을 쓴 수하들이 루터를 납치하여 바르트부르트 성으로 데리고 가게 한 것.[* 도중에 루터를 추종하던 기사들이 자신들이 지지하고 보호하겠다고 제의하지만, 루터는 이들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의도를 꿰뚫어보고 거절한다. 이들은 다음 해 기사들의 난을 일으켰고 토벌당했다.] 그곳에서 루터는 하인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소문이 나지 않게 [[기사(역사)|기사]] 게오르크로 신분을 위장하여 [[수도복]]을 벗고 긴 수염을 길렀다. 루터는 10개월 동안 성 안 요새에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다.[* 이 시기 나온 건 신약 성서이고, 1516년 발간된 [[에라스뮈스]]판 헬라어 성서를 참조했다.] 성서는 다음 해인 1522년 9월 라이프치히에서 초판으로 출판되었고, [[독일어]] 성경 루터번역판은 전 독일에 퍼지며 [[종교 개혁]]의 불길을 들불처럼 번지게 만들었다. 바르트부르크에서 지내는 동안 수도서원도 철회하고, 아버지에게 사과 편지도 썼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제가 된 불순종에 사과하며, 그렇지만 소년 시절의 맹목적인 순종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밝혔다. 1521년 겨울 비텐베르크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다른 신학교수 안드레아스 칼슈타트, 츠비카우의 예언자들, 토마스 뮌처라는 급진 개혁가들이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성경도 필요 없고 직통으로 하늘의 계시를 받는다는 신비주의적 이론 등을 주장하였고, [[사제]]계급은 인간의 제도로 없어져야 된다는 주장에 더 나가서 루터가 주장한 설교자이며 교육자([[목사]])의 존재도 필요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루터의 추종자이자 동료였던 [[필리프 멜란히톤]]은 우물쭈물해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멜란히톤은 원래 언어학자라 신학교수 칼슈타트에게 토론에서 완전히 박살났다. 칼슈타트는 37세였는데 자신은 결혼하라는 계시를 받았다(?)며 15세 소녀를 아내로 맞았다. 신학적으로 루터에게 비판받자 다른 곳에서도 크게 지지를 못 받았고 결국 떠돌다가, 그나마 가장 온건했기 때문에 루터에게 용서를 빌고 비텐베르크에 다시 정착했다. 칼슈타트의 딸은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가 대녀로 삼았다고 한다.] 비텐베르크의 혼란을 전해 듣고, 루터는 선제후에게 "나를 보호하려는 의도는 고맙지만, 황제의 칙령대로 체포당하는 것을 막지 말고 순종하라"며 석방을 요구했고, 1522년 3월 9일 다시 비텐베르크에 나타났다.[* [[레오 10세]]가 사망하고 개혁성향의 교황 [[하드리아노 6세]]가 즉위한데다가, 카를 5세는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전쟁을 준비하러 이탈리아를 거쳐 스페인에 가있었기에 루터에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말고도 2가지 위협에 직면했다. 자신의 거주지인 [[작센 선제후국]]은 다행히 선제후가 자신을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종교 개혁]]이 탄압받지는 않았지만, 근처 브란덴부르크와 마그데부르크에서는 시민과 농민들의 종교개혁 요구를 제후와 영주들이 탄압하고 나섰고, 그에 반발한 급진적 성향의 개혁가들이 오히려 힘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평화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오히려 필리프 멜란히톤과 느긋하게 [[맥주]]를 퍼먹으며 주적인 교황을 칭찬(?)하면서 원칙을 세웠는데, 실질적이고 독자적인 개혁을 구상했다. 먼저 '교회의 개혁은 온건해야 하고 폭력을 배제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비텐베르크에 오자 8일간의 설교로 급진주의자들을 자제시켰는데, '교회는 사랑이 있어야 하고, 급진적인 개혁은 '''믿음이 약한 형제들을 흔들리게 할 수 있다''' 는 점을 고려해야 된다'고 역설했다. 과격주의자들의 논리에 반박하여 다음 해인 1523년 ≪정부에 대한 글 (obrigkeitsschrift)≫을 발표하며 구체적으로 두 정부론(두 왕국론)에 대한 이론서를 출판했다. 구체적으로 세속정부에 대해, 그들에게 어느 정도 복종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영적인 세계와 세속적인 세계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이며 급진개혁파와 [[재세례파]]가 주장하듯이 세속적 영역은 악마나 사탄이 통치하는 왕국이 아니다.[* 사실 3가지 정부(왕국)이 있다고 설명하는데 과격혁명론자들은 세속왕국과 사탄의 역사로 보고 적대시 한 반면, 루터는 세속정부는 사탄의 왕국이 아닌 별개의 세계로 본 것.] 하나님이 먼저 교회를 만들어 영의 정부를 만들었고 여기에선 만인이 평등하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모두 선한 자가 아니고 국경밖엔 이교도들이 있기에, 인간 세상의 세속정부는 여러 분쟁을 조정하고 외부로부터 기독교 문명을 보호하기 위해 법과 검으로 통치해야 하며, 여기에서 인간은 세속정부의 불평등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때 루터의 추종자였던 토마스 뮌처와 많은 농민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농민들의 반란에서 처음에는 영주들과 농민들의 상호 양보와 포용을 요구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과격한 양상을 보이자 [[조센징은 패야 말을 잘 듣는다|광포한 독일 놈들은 패야 말을 듣는다]]며 강력한 진압을 찬성했다.[* 다만 루터도 신학적인 측면에서 가톨릭 교도권과 대립했던 것이지 무슨 민중혁명을 바라고 잇던 건 아니었을 것이고, 루터를 보호하던 제후들도 귀족이었기 때문에 농민반란을 지지하거나 동조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와 현재까지 비판을 많이 받았다. (자세한 것은 비판 항목에서.) 결국 영적인 정부와 세속적인 정부와의 구분은 독일 제후들에게 지지까지는 아니지만[* [[종교 개혁]] 초기에는 헤센 방백국과 [[작센 선제후국]],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국을 제외하면 유력 제후들은 아직 종교 개혁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지 못했다. 1531년 당시 루터 쪽은 5개 제후와 14개 제국도시였는데 이 정도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 겸 [[나폴리 왕국|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시칠리아]] 국왕이었던 카를 5세에 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고, 후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나 [[팔츠 선제후국|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팔츠)|프리드리히 2세]]처럼 개인적으로 [[루터교회]]로 개종한 제후들도 있긴 하지만 루터가 죽기 전 통치령 자체에 종교개혁을 시행한 유력 제후국은 작센 선제후국, 헤센 방백국,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국, [[하노버 왕국|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넷 뿐이었다.(군소제후들도 많은 편도 아니었다.)]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고, 훗날 루터교회로 개종하는 제후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루터는 칼슈타트와 토마스 뮌처, 츠비카우의 예언자들에 대한 반대 입장이 확고했다. 먼저 칼슈타트를 논쟁 끝에 추방했다. 혼란으로 무정부 상태 타령은 과장된 소리였다.[* 비텐베르크는 선제후의 궁정이 있고 군대가 있었는데 무법천지 폭도 떼가 점령하는 건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선제후국의 통치자는 선제후이긴 하고 관료제는 자리 잡진 않았지만 실제적으론 법률가, 학자 등의 참사회가 통치했었다. 농민 반란을 이끈 토마스 뮌처도 초기 시절엔 대놓고 막나가진 않았다. 츠비카우에서 설교 내용으로 물의를 빚자 가볍게 추방당하는 정도로 끝났다. 그 후 과격화 된 것.], [[7성사]]에서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제외한 5개 성사 폐지는 농민들과 시민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사제들이 성사를 집전하면서 부당한 금전수취를 많이 했기 때문.[* 예를 들어 [[병자성사]]에 돈을 내지 않으면 교회에서 관리하는 묘지 자리를 팔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은 뒷산이나 밭에다 부모를 묻어야했다. 이런 폐해 때문에 종교개혁 시기 묘지 관리권을 세속적인 일로 보고 교회에서 시 자치위원회로 이전했다.] 성찬과 전례의 개혁은 시간을 두고 진행했는데, 화체설(성변화)이니 공재설이니 하는 것은 기존의 신자들에게 시민계층이야 알아먹겠지만,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지한 농부들은 새로 가르친 [[독일어]] [[주기도문]]이 너무 길다고 불평했으며, 기존의 사제들이 [[라틴어]]로 중얼중얼 하는 것을 주술적 효과가 있다고 믿었었다. 기존의 잘못된 관행으로 가톨릭교회에서 [[성체성사]] 때 준 성체(밀떡)를 입에서 몰래 꺼내서 집에 귀신 쫓는 용도로 쓰는 등, 기존의 미신적 관행에 대한 전통이 깊었기 때문이다. [[수도원]]도 [[수도자]]들이 자진해서 나가는 바람에 텅 비는 경우가 많았고, 기존의 남녀 수도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루터가 많이 한 것이, 수사들을 취직(대부분 [[목사]]로)시키고 수녀들을 시집보낸 것이었다. 나이 든 수도자들은 갈 곳도 없고 해서 수도원에서 그대로 지내게 되었고, 자연스레 그들이 죽으면 수도원은 학교나 새로운 교회의 장소로 활용했다. 비텐베르크에서의 종교 개혁은 차츰 자리를 잡았고, 새로운 교회의 예배 의식과 목사 양성은 루터가 후반 생애에 중점을 두고 시행했다. [[츠비카우]]의 예언자들과 토마스 뮌처에 대해서는 더욱 단호했는데, 루터는 이들에 대해 "사회ㆍ정치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꿈을 추구하는 자들로, 영적인 평등이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이들 광신도 집단은 교회와 세속 국가를 동일시함으로써 종교와 사회를 해체시킨다"고 여겼다. 특히나 영적계시 타령하면서 [[하나님]]께 직통으로 계시를 받았다며 [[예언자]] 드립하는 이들은 자신이 자주 공격한 [[교황]]과 다름없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이들을 놔둘 경우 교황의 복제판이 출몰할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토마스 뮌처는 초반에 루터의 명성보다 지지받지 못하자 1524년부터 남독일 슈바벤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봉기가 일어난 독일 농민의 봉기 와중에 뮌처도 합류했고 튀링겐과 프랑켄 지역을 돌며 농민들을 선동했고, 이 파급력은 퍼져나갔다. 1525년 교황청 정벌과 가톨릭교회 공격, 영주ㆍ지주들 살해와 사유재산 폐지, 무신론자 척살 등의 기치를 내걸고 영주들에 대항하다 패망한다. 남은 과격 [[재세례파]]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는데, 과격혁명론자들과 재세례파는 동의어가 아니다. 물론 이들이 모두 유아세례를 부정하긴 했지만, 재세례파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으며 농민전쟁을 이끈 토마스 뮌처, 한스 뎅크, 뮌스터에 신정국가를 건설한 '라이덴의 얀' 등의 과격노선이 있는 반면, [[오스트리아 대공국]]에서 비폭력 무저항의 후터파, 츠빙글리와 결별한 스위스 형제단 등은 이들과 연결점도 없고 같은 노선도 아니다.]이 세속 정부를 부정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영주들을 가나안인으로 농민들을 선택받은 백성으로 선동하며, 살인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합리화하여 도시를 점거하여 지상에서 [[천년왕국]]을 건설한다며 [[일부다처제]] 신정국가[* "디모데전서(3:2)에 감독(장로)는 한 아내를 두며" 구절의 해석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장로나 감독이 아니면 구약시대 족장처럼 일부다처제로 해도 된다.'라고 보고 우두머리들은 10명이 넘는 아내를 두었고, 거절하는 여성은 살해했다.]를 만들려는 행태를 보였고 루터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이며 당시 최고 석학이던 [[에라스뮈스]]와는 한때 학문적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루터보다 앞서서 [[유럽]]의 지성으로 칭송받았던 에라스뮈스의 인문주의 성향과 원전 연구가 루터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으며, 루터의 [[가톨릭]]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에라스뮈스가 변호하는 일도 있었다. 에라스뮈스 판 그리스어 원어 신약성서는 루터가 독일판 번역을 할 때도 다수 참조할 정도이다. 하지만 종교개혁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가진 가능성을 긍정하며 [[가톨릭교회]]를 온건하게 개혁하기를 바랐던 에라스뮈스와 달리, 루터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가진 가능성을 부정하며 가톨릭교회의 중세 신학을 정면으로 파괴하기를 원했다. 결국 두 사람은 학문적 반박에서 시작하여 점점 오고 가는 말이 험악해지더니, 글과 발언으로 서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다가 학문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다만 이 둘이 주로 서신을 통해 논쟁을 벌였고, 그때의 서신이 현재도 남아 있어 [[에라스뮈스]]와 루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